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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차의 꿈과 스리랑카의 추억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모여서 점심이라도 같이 하자는 안부 전화는 10년이 넘는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추억의 연못 속에 잠겨 있던 그리운 얼굴들이 작은 파문을 일으키며 마음을 설레게 만듭니다.


1998년 IMF 사태는 당시 대학 졸업반이었던 학생들에게는 핵폭탄의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경제 학자들에게는 중진국의 문턱을 넘어 선진국으로 진입하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아 보이던 대한민국 경제의 자존감에 큰 상처를 주었던 변환점으로 기억되곤 합니다.

하지만 수많은 가정들이 그야말로 풍지박살 나고 평생 고용이라는 사회적 관습이 처음으로 깨어져 나가기 시작했던 가슴 아픈 시절의 고통의 트라우마로 남아 있습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대기업의 연쇄 부도가 신문 지면을 연일 장식하면서 청년 실업의 심각성은 우선순위에 밀려 사회적 관심을 받기 조차 어려운 우리 세대의 잃어버린 시간들이었습니다.


심지어 인터넷 구인 구직 사이트를 둘러보아도 신규 채용 관련 공지가 한 페이지를 넘기기 쉽지 않을 정도라면 더 할 말이 없겠죠.

갈수록 심각해지는 최근의 경제 상황에서 파생되는 우울감과 당시의 바닥을 모를 정도의 절망감은 묘하게 비슷한 면이 있어 두렵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두드리다 보면 최소한의 먹고살 길은 열리는 것도 오랜 인생의 진리이기도 합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해외 취업으로 첫 직장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인도양의 진주라 불리는 홍차의 나라 스리랑카(Sri Lanka)였습니다.

신밧드의 모험에 등장하는 신비의 섬인 세렌디브(Serendib)가 실론(Cylon), 오늘날의 스리랑카입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스리랑카의 경제 자유 구역 내에 위치한 한국계 기업의 염색 공장에서 시작된 생활은 어쩌면 작은 출발점이었겠지만 인생의 방향을 결정짓는 큰 발걸음이기도 했습니다.

수도 콜롬보(Colombo)에 인근에 위치한 기숙사에서 주말을 보내는 대신 천혜의 자연환경을 가진 인도양의 해변 호텔의 수영장에서 달콤한 코코넛 주스를 마시며 일광욕을 즐기는 신입 사원이라니...

밀려드는 유럽 관광객에 의해 일찍부터 발전된 스리랑카의 호텔 산업은 특급 호텔의 웅장한 시설을 자랑하면서도 가격은 우리나라에 비교하면 매우 저렴했습니다.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당시 기억으론 호텔 수영장 이용은 오백 루피(한화 약 3,800원)만 지불하면 하루 종일 파라솔 아래 뒹굴 거리며 무료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스리랑카는 열대 기후로 매우 고온다습하여 처음 방문한 한국인들이 장기간 생활하기에는 적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고산지대에 가면 한국의 청명한 가을 날씨를 느낄 수 있는 지역도 있습니다.

세계 3대 명차 산지 중 하나인 스리랑카의 홍차가 재배되는 해발 1,868m에 위치한 누와라 엘리야(Nuwara Eliya)는 우리의 대관령과 보성 녹차밭을 합친 모습입니다.

꾸불꾸불 산길을 마주하며 올라가다 내려다보던 실론티(Ceylon tea)의 아름다운 전경은 더위와 외로움에 지쳤던 청년의 마음에 나중에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꼭 다시 방문해야지 하는 각오도 다지게 했던 장소입니다.

하지만 인생살이가 생각 같지 않으니 그 후로 지금껏 거의 20년간 다시 갈 기회가 없었네요..


스리랑카에는 하늘 위에 떠 있는 구름 위의 성- 시기리야(Sigiriya)도 있습니다.

얼핏 보면 페루의 잉카 문명의 고대 비밀 도시였던 마추픽추(Machu picchu)와 비슷해 보이지만 깎아지른 듯한 붉은 바위 산에 건설한 신비의 성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만화 영화 천공의 성-라퓨타(天空の城ラピュタ)에 나오는 전설의 왕국을 연상시킵니다.

<하늘위의 성 시기리야>

어디가 현실이고 어디가 만화인지 모호해지는 환상의 경계,  그곳에는 부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라 정신병에 시달렸던 카사 피 왕이 만든 난공 불락의 요새 시기리야가 있었습니다.

<천공의 성-라퓨타>

하지만 제가 근무하던 시절, 한없이 아름다울 것만 같은 스리랑카에는 내전이 치열하게 벌어지던 죽음의 땅이기도 했습니다.

스리랑카 내전이 잉태되었던 불행의 씨앗은 영국의 식민 통치에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아편 전쟁 이후 중국과의 차(tea) 교역이 원활하지 않게 된 영국은 스리랑카 고산지대가 차 재배에 적합하다는 것을 알고 당시 인도의 최하층 계급이었던 타밀족을 대량으로 이주시키게 됩니다.

하지만 1948년 스리랑카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게 되자 당시 2천만 인구 중 74% 정도를 차지하던 원주민인 싱할라 족은 타밀족에 대한 탄압과 박해를 시작하게 됩니다.

이에 대한 반발로 1983년 시작된 내전은 2009년 종식 때까지 26년간 지속되며 약 8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낸 아시아 최장기 내전으로 기록됩니다.

한때 스리랑카 북부의 15%를 차지하며 위세를 떨치던 타밀 반군-타밀 타이거-는 정부군의 공세에 밀려 내전 마지막 몇 개월간 무려 4만 명의 희생자를 내며 소멸하게 되었지만 너무나 많은 민간인 학살에 대한 진상 규명 문제는 아직도 스리랑카인들의 가슴속에 상처로 남아 있지 않을까 합니다.


실험실에 근무하면서 출근 때마다 밝게 인사를 건네었던 싱할라족 여직원이 오빠가 전투 중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오열하던 모습은 전쟁의 아픔이 멀리 있지 않음을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삶에서 망설이며 하지 못했던 일들은 항상 후회로 남아 있게 됩니다.

단지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아무것도 모르던 신입 사원임에도 매니저 자리를 꿰차고 있었던 제가 현지 직원들의 아픔에 조금 더 공감해 주고 따뜻하게 감싸줄 걸 하는 후회는 회사를 떠나고 난 후 진한 여운으로 추억의 강물 위를 떠돌고 있습니다.


회사를 사직하던 날, 현지 직원들이 보자기에 곱게 포장해 이별의 선물로 수줍게 건네주었던 자그만 소버린 금화는 안방 서랍에 고이 간직되어 있습니다.

외롭고 지칠 때마다 가끔 작은 금화를 꺼내 보면 천방지축으로 철없이 굴던 신입 매니저도 따뜻한 미소로 반갑게 맞아 주던 현지 직원들이 떠오릅니다.

나는 누군가에게 따뜻함을 선물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을까.. 아니 되어 가고 있을까.... 


신입 사원이었던 친구들은 이제 모두 대기업의 사모 펀드 운용 팀장, 보험 회사 지점장, 대형 마트 점장으로 각자의 삶을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시간은 화살처럼 날아가고 흘러간 강물은 되돌아오지 않음을 알고 있습니다.

영화 박하사탕의 설경구는 '나 다시 돌아갈래'를 외쳤지만 결코 상상은 현실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순간... 스리랑카의 적막한 기숙사 침대에 누워 김광석의 '사랑했지만'을 듣고 있던 청년 시절의 내가 중년이 된 나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제대로 살아가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