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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모 없어져 가는 인간이 행복해지기 위한 공감 능력.

가끔은 길을 걷다 마주치는 사람들을 아무나 붙잡고 묻고 싶은 충동이 생깁니다.

당신은 지금 행복한가요?

 

사람들은 모두 행복해지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그 방법과 기준은 백인백색 모두 너무나 다른 모습이라는 것이 놀라운 진실입니다.

누군가는 저 길이 행복의 길이라고 말하지만 또 다른 이는 불행의 언덕이라고 얘기합니다.

같은 사실이라도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삶의 방식과 행동 그리고 필연적으로 만족도 달라지겠지요.


갈수록 대면 접촉은 사라져 가고 온라인으로 더욱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사회입니다.

해외 바이어 중에는 이메일로만 서로 안부를 묻고 거래를 주고받는 사람들도 상당수입니다.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지구 건너편의 익명의 상대와도 신뢰를 기반으로 거래가 성사되는 거대한 전자 네트워크가 세상을 뒤덮고 있는 세상입니다.

하지만 광대하게 펼쳐진 가상 세계에서 많은 분들이 자신이 누구인지 길을 잃고 헤매다 마침내 자신의 자아가 살고 있는 집에 대한 기억마저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모두들 행복해 보이지만 외로움은 더욱 커져만 가는 아이러니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특히 중장년층 나이 지긋하신 분들마저 내면에 억눌린 분노의 감정을 엉뚱한 약자에게 폭발시킨 듯한 참담한 뉴스를 듣는 횟수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어 무언가 해결 방법이 절실합니다.

 

세상에 만연하는 분노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상대적인 소외감, 그리고 감정을 교류하는 공감 능력의 감소는 개인이 해결하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전체 사회가 노력하여 해결하여야 할 과제입니다.


오래전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와 공존했던 네안데르탈인의 유전학적 분석 결과 그들은 현생 인류보다 우월한 신체 조건에 두뇌 용량도 더 커 우수한 지능을 가지고 있었으리라는 가설이 있습니다.


지능이 우수했다면 발달된 언어 체계뿐 아니라 어쩌면 종교의식을 포함한 문화적인 시스템까지 갖춘 사회 형태를 보였을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멸망했고 우리 호모 사피엔스는 살아남았습니다.

현생인류인 호모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은 먹잇감과 생존 자원을 두고 치열한 경쟁을 벌였을 것이라는 사실은 추정이 되지만 실제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여기 흥미로운 주장이 있습니다.


현생 인류는 늑대개의 도움을 받아 약 4만 년 전 유럽 대륙에서 경쟁자 네안데르탈인을 물리쳤다는 주장이 나왔습니다. 

고고학계에서는 약 20만 년 동안 유럽을 지배했던 네안데르탈인이 호모 사피엔스가 아프리카에서 유럽으로 이주한 지 불과 4000여 년 만에 멸종한 이유를 놓고 해석이 분분했었습니다.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에 따르면 미국의 저명 인류학자인 팻 시프먼 펜실베이니아대 교수는 “인류는 늑대로부터 갈라져 나온 초창기 개 덕분에 유럽에서 네안데르탈인을 멸종시킬 수 있었다”라고 밝혔습니다. 

호모 사피엔스가 늑대를 집에서 기르기 시작한 것은 인류가 농사를 짓기 시작한 1만 년 전이 아닌 7만 년 전부터라는 게 시프먼 교수의 주장입니다. 

시프먼 교수는 현생인류가 숱한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지금까지 살아남은 데는 창과 활 등 무기와 월등한 사냥 기술뿐만 아니라 늑대와 맺은 돈독한 ‘동맹관계’가 한몫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우리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가 늑대를 개로 길들였다는 단순한 이유 하나만으로 네안데르탈인과의 생존 경쟁에서 승리할 수는 없었겠지만 개를 사냥의 파트너로서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자체로도 매우 중요한 장점의 하나가 될 수는 있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제가 생각하는 정작 중요한 포인트는 다른 곳에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바로 동일 종족을 뛰어넘어 다른 생명체와도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겨났다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공감 능력의 확대는 개인의 생존과 안위만을 고민하던 원시 인류가 지구 전체를 지배하는 종족으로 성장할 수 있게 만든 생존의 비밀일 것입니다.

 

숭실대 김근배 교수님의 저서인 '애덤 스미스의 따뜻한 손'이라는 책을 보면 공감(sympathy)에 관해 우리가 그동안 잘 알지 못했던 애덤 스미스의 진면목을 알 수가 있습니다.

'국부론'으로 유명한 애덤 스미스를 흔히들 보이지 않는 시장의 손을 강조한 신자유주의 경제 학자라고 여기는 오해들이 있습니다만 사실 그는 '도덕 감정론'에서 공감을 강조한 따뜻한 철학자였습니다.


국부론에서 정부가 간섭하지 않고 시장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한 배경에는 그 당시 초기 자본주의 사회 구조에서 노동자를 위한 배려가 녹아들어 가 있는 논리였습니다.

당시 영국의 시장은 상인과 제조 업자가 국가 권력과 결탁하여 시장을 좌지우지하는 상황이었기에 노동자의 입장에서는 일방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중상주의를 주장하며 상인 자본만을 보호하던 국가 권력의 보호막이 사라지는 편이 노동자의 권리 향상에 필수적인 요소였을 것입니다.

거대 자본 세력이 독점한 시장에 정부가 간섭하지 말라는 뜻으로 현대 산업의 구조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은 진실이 완전히 뒤 바뀐 오류인 것입니다.


제 글을 구독하시는 분들은 이전 글에서 아인슈타인이 경제 공황을 타파하기 위해 주장했던 내용들과 애덤 스미스가 주장했던 따뜻한 시장 논리와의 유사성을 파악하실 수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공감 능력은 광대한 네트워크망이 지배하는 현시대뿐만 아니라 인공 지능이 모든 분야에 상상 불허의 영향력을 미칠 미래에도 여전히 가장 유효한 인류만의 생존 수단이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좋은 미래는 오래전 과거 사냥개가 우리에게 끼쳤던 유익이 인공지능을 통해 우리에게 현실화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배경에는 기계와 인간과의 공감이 가장 핵심입니다.


변화와 개혁은 서로 밀접한 관계로 함께 살아가는 동반자와 같습니다.

변화가 있다면 반드시 반동도 있게 마련입니다.


현재 인류에게 닥친 자원 고갈 및 환경오염 등 문제가 해결된다면 인류는 한 단계 진화된 모습으로 생태학적 우위종으로서의 삶을 이어나갈 수 있을 것이라 조심스럽게 예견해 봅니다..

어쩌면 인공지능은 늑대의 모습으로 길들여지지 않은 상태로 남게 될 수도, 아니면 스스로 새로운 주인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멸종된 네안데르탈인이 되지 않기 위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스스로 어떤 대비를 하여야 할까 한 번쯤은 고민해 보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