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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겁한 변명입니다. 궁색한 삶에 대한 애착에 관하여..

영화 실미도에서 주인공은 북한에 침투하여 김일성을 암살하기 위해 급조된 특수 부대로 강제로 착출 되어 고된 훈련을 받게 됩니다.

매일 구타당하며 지옥의 섬을 탈출하기만을 꿈꾸던 훈련병들은 어느새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일당백의 용사로 거듭납니다.

납치된 피해자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납치범을 사랑하는 것으로 적응한다는 일종의 스톡홀름 증후군일까요?

처음에 감정과는 전혀 다르게 어서 빨리 적지에 침투하여 임무를 수행하기를 간절히 원하게 되는 주인공과 훈련병들...

하지만 정치인들의 필요에 의해 언제든지 부담 없이 내팽개쳐질 수 있는 소모품에 불과한 그들의 존재는 상황이 변하자 금세 잊히고 부정당하게 됩니다.

결국 반란을 선택하고 만 주인공 설경구는 부대장으로 나왔던 안성기에게 총을 겨누며 외마디 절규를 합니다.

'비겁한 변명입니다'

그렇습니다. 

상황이 변하여 최선을 다했지만 지키지 못했다는 것은 피해를 고스란히 껴안아야 하는 당사자에게는 그저 비겁한 변명에 불과한 것입니다.

출처: 실미도 포스터


누구에게나 사노라면 쓰나미와 같은 큰 어려움이 닥쳐올 때가 있습니다. 

화가 치솟기도 하고 왜 나만 이런 어려움을 겪나 하는 서글픔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반복되는 궁색한 삶에 대한 깊은 패배감의 늪에 허우적거리기도 합니다.


불치병에 걸린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네 가지 단계가 있다고들 합니다.


첫 번째는 부정의 단계입니다.

의사의 오진 혹은 무언가 잘 못된 진료 과정으로 인해 기인한 거짓으로 믿고 싶은 상태입니다. 

내가 처한 환경에 대한 강한 부정으로부터 시작되는 자신의 불치병에 대한 부정은 사실 내면에 큰 두려움을 동반하는 상태입니다. 

과학적인 확률로 따져 보면 오진일 가능성이 높은 단계이긴 하지만 가장 기분이 찜찜한 단계가 아닐까 합니다.


두 번째는 분노의 단계입니다.

불치병이 걸린 것이 확실해지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더욱 커져 내면의 심연에 잠자고 있던 어두운 악마를 깨우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강한 두려움은 강한 삶에 대한 애착에 비례하여 자신 속의 악마에게 미친 듯한 분노를 불러일으켜 주위 사람들에게 활화산과 같은 괴로운 경험을 선사합니다.

평상시 아무리 고매한 인품을 가진 분들도 이 시기에는 별 상스러운 욕설을 내뱉는 경우가 발생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곤 합니다.

꼭 불치병에 걸린 경우가 아니더라도 죽음을 앞둔 노인분들에게 상당히 많이 발생하는 감정이 아닐까요..


세 번째 단계는 절망의 단계입니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피할 수 없는 냉혹한 사실은 삶에 활력을 이미 소모해 버린 육신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버거워 정신마저 어두운 감옥에 갇혀 버리게 합니다.

창살 없는 어두 침침한 감옥은 사형수의 심장을 가진 영혼에 가하는 마지막 고통스러운 고문과 같습니다.

절망은 끝이 없는 우울함과 같아서 그 절망의 심연은 필시 영원한 죽음만으로 해결이 될 것 같은 느낌...

현대인의 대부분이 조금씩은 우울증을 평상적인 생활에서도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극단적인 우울함의 끝은 어디일지 상상하는 것만으로 끔찍한 마음입니다.


마지막은 체념의 단계입니다.

죽음에 이르기 전 가장 짧은 시기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정리할 수 있도록 신이 허락한 시간이 아닐까 합니다.

부정을 거쳐 분노로 그리고 절망에 이르는 여정이 자신만을 위한 여정이었다면 체념의 시간은 자신을 둘러싼 주위 사람들과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 고뇌하는 여행입니다.

특히 사랑하는 가족과의 헤어짐에 대해 생각하며 차분히 짐을 꾸려 저승길로 떠나기 전 사랑하는 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입니다.

체념이란 어떤 의미론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에 대한 평안함과 같은 뜻이 아닐까요.


인생에 있어 이런 죽음에 대한 고통까지는 아니더라도 삶이 너무 지치고 힘들 때가 시시 때 때로 생기곤 합니다.

모든 사람은 드라마와 같은 인생을 살고 있으니 주인공에게 닥치는 시련은 모두 다를 것입니다.

좋아하는 인형을 잃어버린 꼬마와 밤새워 공부했던 시험을 망친 중고등학생, 연인에게 버림받은 청년, 평생을 바쳐왔던 직장에서 쫓겨 나는 중년 등등, 그 모두에게 누구의 고통이 더 큰가 얘기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그 시기에 자신만이 느끼는 고통은 세상에서 평가하는 절대적인 고통의 수치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믿었던 거래처에서 수금이 되지 않아 쓰라린 마음을 한잔의 술로 다스리는 자영업자 분들의 소식이 요즘 자주 들려옵니다. 

또 투자했던 사업에서 어려움이 생겨 현금 흐름에 문제가 생기기도 합니다.

(사실 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ㅎㅎ)

불행은 혼자 방문하지 않고 항상 동반자를 데리고 온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런데 인생을 살다 보니 맞기도 하고 그렇지도 않기도 한 것 같습니다.


무언가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 어려움에만 매몰되다 보면 눈 앞에 뻔한 함정도 피하지 못하여 더 깊은 늪에 빠져 허우적 대고 있기 쉽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 영화 속에 나왔던 대사를 나지막이 되새겨 봅니다.

비겁한 변명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에게 비겁해지지 않고 당당해지는 주문을 외워 봅니다.

당신의 삶은 결코 궁색하지 않습니다.

지금 닥치는 시련은 나를 단련하고 더욱 강하게 해 줄 것입니다.


가슴을 펴고 외쳐 봅니다.

내 돈 떼먹고 안 갚는 태국 바이어야! 잘 먹고 잘 사세요...

소송 들어가니 법정에서 뵙겠습니다.ㅗ0ㅗ

출처: 인터넷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