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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중국해 분쟁에서 대한민국의 미래를 바라보다(1)

여기 큰 고래 두 마리가 연못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 마리의 작은 새우들도 서로 투탁 거리면서도 함께 살아가고 있지요.

두 마리의 고래들은 자신이 연못의 주인이 되기 위해 상대방을 노려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한쪽 고래가 상대편 고래에 비해 덩치가 작아서 만약 싸우게 된다면 망신만 당하고 연못에서 쫓겨날지도 모르는 상황인데요. 알면서도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지요..


지금 남중국해(서필리핀해 라고도하는데 최근 우리나라 언론에서는 그냥 남중국해로 부르고 있습니다.) 분쟁 상황이 굳이 비유하자면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합니다.

미국과 중국이라는 글로벌 슈퍼 파워와 동남아시아 국가 연합(ASEAN)이라는 지역 세력들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 경제 및 정치 그리고 군사적으로도 민감한 분쟁의 씨앗을 품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一帶一路·21세기 육상과 해상 실크로드 프로젝트) 국제협력 정상포럼 참석차 베이징을 방문 중이던 필리핀 대통령 두테르테가 중국 시진핑 국가 주석을 만난 자리에서 필리핀 인근에서 석유 시추를 하겠다고 했다가 전쟁까지 각오하라는 협박(?)을 당한 바도 있습니다. 


중국은 초등학교부터 교육을 통해 U자형으로 이루어진 남중국해가 자국의 영토라는 교육을 시키고 있기에 배타적 영해권을 인정할 수 없다고 명시한 국제 상설 중재 재판소(PCA)의 판결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대다수는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우리도 중국과 이어도(영어명: socotra rock) 영토 분쟁을 겪고 있습니다.

이어도는 대한민국 국토 최남단 섬인 마라도에서 남서쪽으로 149km 떨어져 있으며 중국 측 위산 다오 섬에서는 287km 거리에 있는 암초입니다.

총 중량 3,400톤에 이르며 무인으로 자동 운영되는 우리의 첨단 해양 관측기지가 2003년 완공되어 실효적 지배를 하고 있는 명실상부한 대한민국의 영토입니다. 

동남아 국가들과의 남중국해 분쟁 및  일본과의 센카쿠(중국명: 다오위다오) 영토 분쟁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는 중국의 사정상 현재는 이렇다 할 마찰을 빚고 있지는 않지만 미래에 대비하여 신중한 준비가 필요한 분야입니다. 

 

미래의 타산지석으로 삼기 위해 일단 현재의 남중국해 분쟁 현황부터 살펴볼까요?

(필자의 주관적 관점이니 전문가분들과는 다를 수도 있는 점 양해 바랍니다.)


남중국해는 아래 사진에서 보시는 것처럼 중국의 해남도 아래쪽부터 베트남, 필리핀,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브루나이, 인도네시아까지 이르는 광활한 바다입니다.

남중국해가 얼마나 중요한 경제적 가치가 있는지는 말레이시아나 싱가포르에서 비행기를 타고 오시다 아래를 쳐다보면 체감하실 수 있습니다.

구름 위로 비행하는 탓에 아래가 잘 보이지는 않지만 광대한 바다 위로 중국과 한국, 일본으로 향하는 수많은 원유 수송선들이 매일 지나다니고 각종 화물을 가득 실은 대형 선박들로 붐비는 항로입니다.

아직 본격적인 석유나 광물 탐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지만 막대한 양의 지하 광물의 보고로도 각광받고 있습니다.


지도를 보시면 주요 분쟁 당사자는 중국, 베트남, 필리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정도입니다.

그 외 싱가포르, 브루나이는 워낙 소국이니 일단 제쳐 두고 분석 시작해 보겠습니다.


남중국해 문제가 일사 분란하게 해결이 되지 못하는 원인은 역사적 이유부터 현재의 외교 상황, 각국의 군사력 차이 그리고 각국의 문화 심리적 갈등을 비롯한 너무나 많은 세부 요인으로 인해 쉽게 해결이 나기가 어렵습니다.


또한 동남아 각국의 경제에 중국이 절대적인 무역 파트너로 등장하게 되면서 이해 득실에 따라 입장 차이가 극명하게 갈리고 있는 현실입니다.


일례로 캄보디아는 중국의 막대한 경제 원조로 인해 아세안 회의가 있을 때마다 이미 중국의 충실한 대변인 역할을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베트남은 역사적으로 많은 중국의 침략과 간섭을 통해 생성된 뿌리 깊은 민족주의 감정이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공산당 정부에 대한 불신이 표현되기 어려운 사회주의 국가인 베트남에서 같은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에 대한 반감이 자국 공산당에 대한 불만으로 은유적으로 표현되는 점을 우려한 정부는 최대한 베트남 민중의 반중 감정을 억제시키고자 합니다.

파라셀 군도에 중국이 석유 시추를 하고자 했을 때 발생하였던 격렬한 반중 데모를 강제 해산시킨 사례를 보면 정부 측의 고민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호찌민의 북베트남이 전쟁을 통하여 남베트남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구 소련과 중국의 도움을 많이 받은 바도 있고 무엇보다 경제 부흥을 꿈꾸는 정부 입장에서는 마찰 자체가 상당히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의 중국에 대한 대응은 대외적으로 상당히 강경하며 군사적 방비도 충실한 편입니다.

(베트남의 독자 세력화에 불만을 품은 중국이 국경 지역에 파견한 군대를 베트남 예비군이 전멸시켰던 사례를 볼 때 베트남의 군사적 잠재력은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러시아와 이스라엘제 대함 미사일로 무장한 군대에 의해 해안 경비가 이루어지는 베트남은 중국 해군에게 큰 위협을 줄 수가 있습니다.


필리핀은 어떨까요?

필리핀인들의 감정 상태는 사실 양비론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페인의 지배를 끝내기 위해 협력했던 미국이 자신들을 배신하고 식민 지배에 반대하는 약 60만에 가까운 시민들을 학살하였던 1899년~1901년 미국 필리핀 전쟁의 역사적 교훈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중국도 싫지만 미국은 더 싫은 감정이 기저에 깔려 있는 것이지요. 

우리나라에서 볼 때 필리핀의 두테르테 대통령이 왜 미국에 비협조적일까 의아해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자국의 영해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중국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협조가 필수적일 텐데 무모한 외교 줄타기를 하는 모습이 이해가 되지 않을 수 도 있습니다.

하지만 내막을 들여다보면 근현대사에서 필리핀의 경제 성장을 가로막았던 주요 요인중 하나인 상위 5%만의 부패 지배 세력을 강력히 후원하고 있던 배후 미국이 스스로 초래한 아이러니이기도 합니다.

현실적으로는 필리핀의 군사력 자체가 너무 형편없는 상황이라 미군의 도움 없는 중국과의 전쟁은 전혀 이길 가망이 없습니다.

베트남이 필리핀보다 일인당 국민 소득이 낮음에도 현대화된 무기 체계를 갖추고자 부단히 노력한 결과 어느 정도 중국 해군에 위협이라도 가능한 수준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필리핀의 해군력은 미국에서 연안 경비선으로 쓰던 노후화된 경비선 몇 척으로 이루어진 수준이며 최근 들어서야 우리가 기증한 퇴역 구축함을 비롯하여 일본에서도 경비함을 기증받아 운영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공군은 그나마 더 한심한 수준입니다.

2005년에 퇴역한 제트기를 마지막으로 헬리콥터 몇 대와 경비행기가 전부인 필리핀 공군에 우리 대한민국에서 생산한 FA-50 경공격기 12대가(2017년 기준) 공급되면서 군의 핵심 전력이 되었습니다. 


여담이지만 베트남과 필리핀의 군사력을 비교해 보면 왠지 남한과 북한의 모습이 조금 오버랩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북한보다 몇십 배 많은 국방 예산을 쓰고 있는 것이 벌써 수십 년인데 전쟁이 나면 질 것이라며 미군의 전시 작전권의 그늘에 숨어 지내고자 하는 장군들을 보면 부끄럽기까지 합니다.

필리핀도 매우 가난한 나라이긴 하지만 국방 관련 부정부패가 없다면 아프리카 최빈국 수준의 이런 참담한 군사력은 아니지 않을까 합니다.


인도네시아는 나름 군사력 부분에 많은 투자를 하여 중국에 위협을 줄 수가 있을 정도의 해군력과 잠수함 부대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런 자신감을 바탕으로 중국 어선의 불법 조업에 선박 나포 후 함포 사격으로 격침시키는 장면도 보여주곤 했습니다.


남중국해 분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단 역사부터 살펴보아야 합니다.


중국이 주장하는 근거가 원래 명나라 시대 이후부터 이 바다가 자신들의 영역이었다는 주장입니다.

본격적인 중국의 해상 무역은 당나라 시절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중국 남부의 항구에서 출발하여 아라비아까지 왕래하던 무역선에는 중국의 도자기와 비단이 실려 일본 및 통일 신라에 이르기까지 해상 실크로드가 구축되었습니다.

바다를 지배한 자가 세계를 지배한 시대, 당나라의 해상 무역은 전성기를 맞았습니다.

하지만 국력이 쇠퇴하면서 송나라 시절에는 남부 항구 도시들에는 중앙 정부의 영향력이 크게 감소되었고 지역 토호 세력들과 해적들이 난무하기도 하였습니다.

송과 원을 거치면서는 해상 무역 금지령 등이 시행되기도 하고 북방 이민족과의 전쟁을 겪으면서 중앙 정부의 관심은 해외 무역보다는 내륙 경제의 안정에 치우쳐 있었습니다. 

명나라가 건국되면서 강력한 왕권을 확립했던 3대 황제 영락제는 동생을 죽이고 수만 명의 정적을 제거하는 과정을 통해 황권을 찬탈했다는 점에 강력한 트라우마(Trauma)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정통성 확립을 위해 일생 동안 끊임없는 정복 전쟁과 해상 정벌 활동을 벌이게 됩니다.

중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함대였던 정화의 명나라 함대는 62척의 함선에 모선의 길이는 150미터, 너비가 62미터에 달했다고 하는데 지금으로 치면 8천 톤 규모의 함선입니다.

(하지만 급격한 추진은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세상의 이치... 이후 중국의 해군력은 간신히 연안을 경비하는 수준으로 명맥을 유지하게 되고 수백 년이 지난 최근 에서야 항공모함을 자체 건조하는 등 원양 해군을 육성하고 있습니다.)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던 콜럼버스의 함대가 약 200톤 규모였다고 하니 당시 명나라 함선에 비하면 조각배 수준에 불과할 정도라 하겠습니다.

역사서에 보면 정화의 해상 정벌이 평화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적으론 대부분의 승무원들이 전투병으로 이루어진 함대였으며 1차 정벌에서는 수천 명의 사상자가 나는 전투를 벌여 당시 남중국해 최대 해적이었던 중국인 진조의를 명나라로 압송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역사는 승자의 편에서 쓰여 지기에 진조 위는 어쩌면 명나라의 노선에 저항했던 독립적 해상 세력일 수도 있겠습니다.)

명나라는 이때 동남아시아 각국에서 조공 관계를 확립하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그 후 청나라는 강력한 중앙 집권 체제를 통하여 해상 무역을 통제하였습니다만 역시 동남아시아 지역에 대한 영토 확장은 관심 밖이었습니다.

국공내전과 일본과의 전쟁을 겪던 중화민국이 타이완으로 쫓겨 간 후 베트남 인근의 파라셀 군도의 몇 개 암초를 점령하면서 영토 분쟁은 다시 부각되었습니다.

당시 베트남군과 중국군의 작은 충돌이 있었습니다만 외교적으로 크게 비화되지는 않았던 듯싶습니다.


이제는 남중국해 분쟁 관련 동남아시아 각국의 역사와 외교 관계를 살펴보겠습니다.


서구 열강의 식민지 쟁탈전이 본격화하면서 동남아시아는 식민 지배의 각축장이 되었습니다.

영국이 인도, 말레이시아를 지배하게 되면서 프랑스는 인도차이나로 불리는 베트남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게 되었고 해양 강국이던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를 스페인은 필리핀을 차지하였습니다.

이후 각국이 독립을 쟁취하게 되면서 서로 간의 견제와 서구 제국들이 통치의 편의를 위해 지도 위에 그어놓았던 영토 분할 문제가 깔끔히 해결되지 않아 앙금처럼 남아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말레이시아의 사라왁(Sarawak) 주는 인도네시아가 한때 무력으로 점령했다 말레이시아가 다시 회복한 사례가 있으며 정치적으로는 아직도 서로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또 필리핀은 말레이시아와는 보르네오 사바주 영유권을 주장으로 대립하고 있습니다.

베트남과 필리핀도 지리적으로 가까움에도 그리 사이가 좋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To be continued-